김창조의 평


생전처음 내 작품에 대한 평을 받았다. 평론가 김창조씨가 그냥 쓰기 뭐했는지 몇 주전에 같이 만나 작품과 사는 얘기들을 나누며 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김창조 선생은 그 자리에서도 말했는데 좋은(다층적인 의미에서) 작품으로 빚을 덜라고 한다. 많은 용기를 얻었다.


Utterance : 아이러니와 숭고 사이의 틈
 


스펙타클(spectacle)은 사슬에 묶인 현대 사회의 악몽이며, 결국 그저 잠들어 있고 싶다는 욕망 말고는 아무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다. The spectacle is the bad dream of a modern society in chains and ultimately expresses nothing more than its wish for sleep.  
         
기 드보르 Guy Debord   


‘에이포리엄 Aforium’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작가노트에서 조충연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의 구상은 지금은 잠복근무 중인 ‘택티컬미디어네트워크(tactical media network)’의 A4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것이다. A4 프로젝트는 당시 기업이나 기관의 정보 부스러기인 이면지를 해킹하고 그 정보를 재전유하는 기획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당시의 이슈들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조충연은 ‘택티컬미디어네트워크(tactical media network)’라는 팀을 통해 전술적(tactical)으로 미디어(media)를 사용하는 작업을 실험한다. 그리고 지금 그의 전술적 미디어는 잠복 근무 중이다. 택티컬 미디어의 전술(tactics)이라는 개념은 권력 제도, 기관들과 관련되는 ‘전략(strategy)’ 개념과 구별된다.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저서에서 유래한 ‘전술’은 권력에 의해 ‘전략’적으로 통제되는 환경 안에서 통제와 예측이 힘든 ‘일상생활에서의 실천(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이라는 개별적이며, 지엽적인 비선형적 운동을 제시한다.

물론, 여기서 68혁명을 정점으로 급속도로 소멸해간 국제 상황주의자(Situationist International)들이 어떻게 행동주의(activism)으로 이어지며 다시 행동주의가 전술적 미디어라는 새로운 노선의 운동방식을 찾게 되는지 일일히 살펴볼 수는 없는 일이다. 단지 ‘예술의 초월(transcendence of art)’을 통해 이를 삶의 지평에 통합시켜내고 스펙타클의 사회로 변모해가는 자본주의의 시스템 속에서 주체가 각성되는 계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상황주의자들이 스스로가 역으로 스펙타클에 의해 그야말로 전용(Detournement)되었던 그 비극적 아이러니(irony)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놀로지의 변화 속에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분투하고 있는 행동주의의 다양한 노선들은 그 철학적 성찰이 크게 진보한 바는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전히 무가치하지 않다는 내 생각을 밝히고 넘어가겠다.

지리멸렬하게 점멸하는 이러한 아이러니와 숭고의 교차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대체로 그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러한 내 시선의 우울이 조충연의 ‘잠복근무’라는 단어에 가서 머뭇거린다. 변명같기도 고백같기도 한 이 단어 앞에서 나는 오랜 시간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서서히 하나의 희망을 떠올린다. 머뭇거린 것은 내 시선이 아니라 조충연이다. 상황주의가 말했던 ‘예술의 초월’을 잊지는 않았으나 생존을 위한 삶의 전선에 서있는 한 전사가 머뭇거린다. DMC 프로젝트 사업을 위해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수정과 출력을 반복해 수북히 쌓인 A4 이면지를 바라보던 한 직장인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중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숨가쁘게 차를 몰아 달려가던 기획자의 뇌에 걸린 드라이브가 청계고가 너머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삼일빌딩의 스펙타클 앞에서 잠시 회전을 멈춘다. 주저한다. 중얼거린다. “잠복근무야.” 드디어 틈이 생긴다. 이 틈은 아이러니와 숭고 사이에서, 상황주의와 행동주의 사이에서,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점점 벌어진다.

눈부신 하늘을 가득 비춰내고 있는 거대한 유리 빌딩의 파사드(façade)를 목도하는 순간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면서도 늘 할 말을 잃고 그저 바라보게 되는 기묘한 꿈 같은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거대한 빌딩과 거울의 결합, 테크놀로지와 일루젼(illusion)의 결합, 실재와 환영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이 현기증은 우리의 언어를 압도한다. 근대가 꾸었던 이러한 기묘한 꿈이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같은 건축가를 통해 처음 실현된 지 반세기 남짓 지난 지금 우리는 그 꿈을 일상의 범용한 현실로 살고 있다.

현대의 삶은 범용해진 스펙타클(spectacle)로 둘러 쌓여있다. 스펙타클은 현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거울은 자신이 비추는 대상이 실재함을 지시하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물론 거울은 사실을 지시한다. 저기 하늘이 실재한다. 여기 도시가 실재한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이므로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너 또한 실재이다. 우리는 이 장치에 반영된 상을 통해 부인할 수 없는 실재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 장치를 우리 스스로가 고안해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스펙타클을 통해 현대 사회를 실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기드보르(Guy Debord)에 의하면 스펙타클은 거울처럼 실재를 지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사회 그 자체로, 사회의 일부이자 사회를 통합하는 실재로 제시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강렬한 총체성의 체험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총체성은 마치 매끈한 빌딩의 표면처럼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닫혀있다. 그것은 실재하지만 여전히 닿을 수 없는 꿈이다. 조충연은 일상이 된 스펙타클의 확고한 광학적, 건축적 구조에 흠집을 낸다. 보란 듯이 한 가운데에 구멍을 낸다. 동시에 거울이 비추고 있던 하늘 한 가운데에도 구멍이 난다. 구멍은 검고 깊이를 알 수 없다. 그 작지만 깊은 심연 속에 조충연의 질문과 성찰이 놓여있다. 거울에 구멍이 날 때 우리는 어떤 미몽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미몽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미몽의 너머에서 심연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깨어진 틈으로부터 춤추는 나비처럼 흩날리는 알 수 없는 전언을 멍하게 바라볼 뿐이다. 조충연의 호접몽(胡蝶夢)에서 춤추고 있는 이 나비들의 이름은 A4이다.

나는 사실 조충연의 잠복근무 앞에서의 내 머뭇거림과 조충연의 삼일빌딩 앞에서의 머뭇거림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는 A4, 덧없이 산개하여 소멸하는 미디어의 무수한 전언들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니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게 틈이 생겨나고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조충연의 작업을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액티비즘 혹은 핵티비즘, 택티컬 미디어의 맥락에서 읽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그의 일상 속에서 문득 한 순간이 정지되어 얼어붙은 듯이 보이고, 그 균열이 가능하지 않을 것만 같은 표면의 확고함이 오히려 어떠한 균열에 기대, 예감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 환각적인 짧은 시간을 건축기사의 제도판으로 옮겨 낸 음악적인 회화라고 보인다. 내 생각이 맞건 틀리건 이후 조충연이 만들어낸 틈이 얼마나 크게 벌어지고 결국 뒤집어져 자기의 내부를 외부로 보여주는가를 지켜볼 만한 일이다.

by yellowsub | 2009/08/29 13:38 | 섬들...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yellowsub.egloos.com/tb/194327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